조선시대 성군 대결 세종과 정조

0
449

조선시대 성군 대결 세종과 정조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를 구분할 때,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로 나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나눈다. 그렇기에 선조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은 전기와 후기의 대표적인 성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조선 전기에 유명한 성군은 누구인가? 한국 만원 지폐의 주인공 세종대왕이 아님에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후기의 성군은 누구인가? 당연히 수원 화성과 사도세자로 유명한 정조이다. 두 왕 모두 뛰어난 업적을 기록하였다.

 둘의 공통점은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는 점이다. 성군의 주된 공통점은 해당 시기에 유명한 학자들이 많았다. 과연 특정 시기에만 똑똑한 인재들이 많았던 것일까? 필자는 강하게 부정한다. 해당 왕의 과업을 함께한 대표적인 학자 두 명이 있다. 장영실과 정약용이다. 그들은 각각 물시계, 해시계, 거중기, 목민심서 등 시대를 대표한 학자였으며, 왕을 보좌한 신하였다. 세종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장영실의 신분은 미천하였으나,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관직에 등용하였고 그는 이에 보답하여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서얼 출신들을 등용하여 서학을 학습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의 상업에 전례 없는 발전이 이루어졌고 무수히 많은 관찬물이 만들어졌다.

 세종의 업적을 살펴보자. 세종은 엄청난 양의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로는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재미있는 이름이다. 순서를 다양하게 바꾸어도 백성을 사랑하여 만든 언어임이 분명하다. 그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백성을 위해 입 모양과 소리를 본떠 언어를 만들었는데, 이 과학성은 현대에 와서도 여러 차례 입증되었다. 그는 중국식이 아닌, 조선에 적합한 농서를 편찬하였으며,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칠정산이란 역법도 편찬하였다.

 또한 세종은 이종무에게 왜를 토벌하라 명해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최윤덕과 김종서에게 각각 4군, 6진을 개척하게 하여 영토를 두만강까지 확장했다. 신기전, 회차 같은 화약 무기도 이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오죽하면 조선시대는 세종이 틀을 잡고 나머지는 그를 보완해나갔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이번에는 정조의 업적을 살펴보겠다. 정조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에 최장수 임금 영조였으며,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다. 영화 사도는 이를 잘 재현하였다. 시간 되면 꼭 보길 바란다. 정조가 즉위하던 때에는 붕당정치가 난리였다. 사실 숙종 때부터 이를 혁파하고자 탕평책이 진행되었지만, 정조는 이들과 다른 준론탕평을 행하였다. 정계에서 소외당했던 소론과 남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도 하였고, 영조의 완론탕평과는 다르게 준론탕평을 진행하였다.

 그는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사도세자 사망 이후, 정조는 많은 암살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호위할 군사력을 증진하였고, 기존에 당파 중심 군 문화에서 자신만의 호위 부대를 만들었다. 또한 수원 화성을 빼놓을 수 없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수원화성은 정조의 이상이라고도 한다. 수도에서 펼치지 못한 그의 꿈을 펼치고자 하였고, 장용영의 외영이 여기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전통편 – 조선시대 최후의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법을 일원화했으며, 영조의 개혁 정책도 반영되었다.

   백성을 사랑했던 조선시대의 두 왕.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둘 중 누가 더 성군인가?

조선시대 성군 대결 세종과 정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