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마광수의 관계, 연세대 교수 야설 쓰고 검찰에 연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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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마광수의 관계, 연세대 교수 야설 쓰고 검찰에 연행되다

<사진> 故 마광수 교수의 홈페이지 “광마클럽”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 훌륭한 시인을 꼽아보라면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꼽아보라면 열에 아홉 윤동주를 택하게 된다. 삶을 고뇌하고 크리스천으로 스스로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던 그의 시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백해무익한, 어째 보면 맹물처럼 밍밍한 인상으로 다가와 많은 이들에게 호불호 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시에 관해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시구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윤동주의 시에 대해서 잘 몰라도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 물으면 별 부담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런 윤동주의 부끄러움, 겸연쩍은 언어는 의외의 인물 의해서 발견되게 된다. 그가 바로 오늘 글의 주인공인 姑 마광수 교수다. 1983년 출간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윤동주 연구’에서 마 교수는 윤동주의 시에서 나타난 상징적인 표현들을 중심으로 윤동주의 문학세계를 연구해,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광수 교수는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관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특히 그 학점 받기 어렵다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학부성적을 올 A로 받으며 전액 장학금을 타고 졸업한 것은 자주 화자가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무사히 학부를 마치고, 연세대학원 석사를 입학한 마광수 교수는 1976년 26세라는 나이에 대학 강의를 시작한다.

28세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후,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선배인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게 된다. 교수를 지내면서 연구에 매진하던 마 교수는 1983년 ‘윤동주 연구’ 논문을 퇴고함으로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리고 1984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세대 국문학과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다.

그러나 마광수 교수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26세의 시인 등단과 연세대 국문학과 수석입학과 같은 그의 커리어보다 그의 삶에 더 큰 임팩트를 준 사건은 바로 《즐거운 사라》필화筆禍사건이다. 1992년 10월 마광수 교수는 ‘음란문서 유포’라는 죄목으로 강의 도중에 들이닥친 검찰에 의해 연행된다.

소설은 현재 판매금지 처분되어서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략 들은 정보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프리섹스를 추구하는 자유분방한 여대생 사라가 성에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몰래 온갖 종류의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류의 내용이다. 지금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내용이지만, 당시 군사정권이던 시절에는 유명 사립대 교수가 야한 소설을 썼다는 것이 당시 정서로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로 보인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마광수 교수는 구속됐고, 교수직을 해임당하게 된다. 1995년 6월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1998년 3월 국민의 정부의 특별 사면으로 옥에서 나오고 교수로 복직하게 된다. 그러나 마 교수는 전과자 신분이 유지가 되어서 교수 연금을 못 받고 가난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2017년 9월 5일, 향년 66세 자살로 마 교수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남들보다 더 일찍 색色적인 화려한 삶을 갈망하고 탐구했던 그는 너무나도 커다란 대가를 치렀어야 했었다. 문학만 줄곧 쫓던 모범생이자 젊은 학자에게 이런 작은 일탈이 커다란 화를 불러온 것을 안타까워하며 시대가 안고 가지 못한 그의 여생을 되새겨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윤동주와 마광수의 관계, 연세대 교수 야설 쓰고 검찰에 연행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