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 자유와 안전은 양자택일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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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안보는 양립하는 가치일까?
과연 어느 한쪽만 선택해야할까?

윌 스미스라는 배우를 굉장히 좋아한다. 할리우드에서 굉장히 다채로운 배역을 맡았다.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수다스러운 개그 캐릭터이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 중 맨 인 블랙, 아이로봇, 수어사이드스쿼드까지 실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가 주연으로 연기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에서는 조금 무거운 역할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1998년 토니 스코트 감독 작품으로, 국가의 안보와 개인의 자유라는 무거운 주제를 드러내는 영화다.

​두 가치는 늘 충돌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정보감찰법’은 미 국가안보국이 실시간으로 전방위적인 감청 및 정보 접근을 허용하는 법이다.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안보 효율은 극대화되지만, 개인 정보 침해 우려가 있다.

​레이놀즈(존 보이트)는 정보감찰법을 추진하고자 하는 미 국가정보국의 부국장이고, 해머슬리는 하원의장이면서 이 법안의 반대 지지자들 중의 대표격이다. 레이놀즈는 법안 통과를 위해 하원 의장인 해머슬리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그를 죽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건너편에서 우연히 이 장면이 조류학자 자비츠의 기러기 관찰 카메라에 찍히게 된다. 이 사실을 레이놀즈가 알게 되었고 그는 자비츠를 추격한다. 자비츠는 쫓기던 도중 상점에서 대학 동창 로버트 딘(윌 스미스)을 만난다. 자비츠는 테이프를 딘 몰래 그의 가방에 넣었고, 상점을 빠져나오자마자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후 딘이 영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놀즈는 딘을 추격한다.

​딘은 처음에 본인이 왜 추격당하는지 알지 못했다. 레이놀즈는 그를 잡기 위해 그의 인간관계를 무너뜨린다. 여기서 감독은 레이놀즈가 꾸미는 일련의 장면들을 통해 부패한 국가권력이 한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초반부에 그의 아내 칼라(레지나 킹)와의 대화를 통해 딘은 정보감찰법에 대해 별 관심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레이놀즈라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모든 생활을 감시당하는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저게 나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감독이 의도한 장치다.

​감독은 영화의 두 인물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치의 대립을 드러내고자 했다. 샘 알버트 상원 의원(스튜어트 윌슨)는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고, 변호사 로버트 딘은 시민의 입장을 대변한다.

“미국엔 수천만의 외국인들이 있고, 많은 수가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샘 알버트 상원 의원의 말이다. 국민의 대표이자,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의원으로써 충분히 납득할만한 주장이다. 반면, 로버트 딘과 그의 아내 칼라의 대화를 듣는다면 생각은 또 달라진다.

“누가 당신의 전화를 도청하면 좋겠어?”

“나 같은 선량한 시민을 왜?”

“선량한 시민, 나쁜 시민을 결정하는 건 누구인데?”

마지막 대사에 감독이 이 영화에서 드러내고자 한 주제의식이 가장 강하게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안보와 자유 중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만약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면 나는 둘 중 개인적으로 안보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싶다. 안보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안보가 무너지면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

​하지만 안보가 커질수록 자유가 줄어든다. 필연적인 일이다. 어디까지 자유를 누릴 것인가는 정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가는 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인신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 이를 보장받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왜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해야 하는가? 국가의 첫 번째 존립 이유는 국민의 보호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태초에 국방, 치안, 소방을 위해 조직되었고, 그 신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깨져서는 안된다.

​사실 완벽한 자유주의는 이상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 그 어떤 통제도 없다면 모두가 이기적인 욕망을 드러낼 것이다. 통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 통제할 것인가? 그것은 분명 더 힘이 있는 쪽의 논리로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우 가까운 미래의 기술발전이 이를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국가는 국민을 감시하고, 국민은 국가를 감시할 수 있는 완벽한 쌍방향의 시스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웹을 통해 국민 전체가 토의할 수 있는 시대가 구현될 것이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서버는 분산 기술을 이용해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냐는 말도 안 된다는 구시대적 발상도 밤새도록 지치지 않는 AI가 들어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영화는 98년 작품이다. 20년도 넘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조용 묻혀 지나갔을 일들을 지금은 실시간으로 알림 받는다.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가치를 수렴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세대에는 실제로 일어나게 되리라 기대한다.